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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중국

<중러 항일 유적지 답사 여행> 용정 명동촌, 윤동주 생가, 연길 연변박물관

여행사에서 준 안내 책자에는 여기를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명동촌(明東村)은 1899년 문병규, 남위언, 김약연, 김하규 등 네 가문이 집단 이주해 형성한 한인 정착촌이다. 마을 이름은 '동쪽을 밝힌다'는 뜻이다.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이 1900년 이 곳으로 이주했으며 1917년 윤동주가 태어났다. 이상설의 서전서숙을 시작으로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김약연의 명동서숙과 캐나다 선교사 베이커가 1920년에 설립한 은진학교, 신흥학교, 동흥중학, 윤동주로 대표되는 대성학교 등 민족교육을 위한 학교가 설립됐고 김약연은 윤동주 생가 바로 옆에 명동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조용하고 조그만 마을의 입구에 시인의 고향이란 입간판과 명동, 윤동주란 글이 새겨진 돌안내판이 서 있다. 지금도 마을엔 그리 많지 않은 가구가 살고 있는 듯하다. 일행 중에 80이 되시는 어머니가 딸과 함께 여행을 왔는데 윤동주 생가를 와 보는 게 소원이셨단다. 다들 어릴 적 외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며 이 집을 방문했을 듯.

 

 

집 안은 온통 그의 시 전시관이다. 여유있게 한 편 한 편 시 감상을 하며 윤동주를 사색하는 시간이 되면 좋으련만,, 해설사의 설명을 사진 찍느라 듣지 못한 아쉬움이 절실하다. 저 멀리 생가 뒤로 범바위가 보인다.

 

 

 

윤동주 생가 지붕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관리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지만 지붕위엔 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가 내부. 추운 북녘땅이라 집 중심에 부엌이 있고 한 쪽엔 사람, 한 쪽엔 짐승 이렇게 공존하고 있다. 제일 왼쪽에 방이 2개, 아이들과 부모가 기거했으리라.

 

 

부엌, 나란히 솥 세 개, 한 개는 여물끓이는 것이란다. 한 치의 열도 버릴 수 없는 부엌의 구조, 추운 곳에서 살아 남고자 한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명동촌의 현재의 모습이 담긴 글, 재미있어 사진에 담아 봤다.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들은 이 곳에도 다르지 않음을 이 글에서 느낀다.

'사업전망이 밝은 고향땅 지신에 돌아가서 창업꿈을 펼치자.'

 

 

 

윤동주 선생은 은진중학을 다녔단다. 학교가 대성중학교로 통폐합되면서 윤동주의 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 윤동주 선생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기념관 정원엔 윤동주 선생의 동상과 시비, 이 기념관을 지은 사람들에 대한 안내가 있다. 옆엔 현재 용정중학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념관 2층 실내에는 윤동주의 사진과 화보, 서적을 비롯해 1900년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용정과 간도 일원의 한인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사촌 송몽규, 문익환 목사님, 아리랑 배우 나운규의 모습도 보인다.

윤동주 선생이 공부했던 교실,,, 풍금, 나무 책상이 정겹다.

 

 

연변박물관은 조선족의 이주 역사와 함께 초기 정착 단계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상세히 소개 전시되어 있다. 고대 역사 유물 중에 청동 거울은 매우 섬세하고 무늬도 다양했다. 정혜공주묘의 벽화는 색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형태가 잘 보존되어 역사적 가치가 높아 보인다.

 

 

연변박물관 앞에 걸린 구호, '습근평총서기',,,여기가 중국땅임을, 중국 정부의 보호 아래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소학교에서 운동회인지 학예회 연습인지를 하고 있고 교문 앞엔 학부모인지 그냥 구경하는 사람인지,,,사람들이 몰려 있다. 재미있어서 한 컷,,, 외관상 시설은 우리 나라보다 좋아 보인다.

 

 

이북식당으로 밥 먹으러 가는 중에 본 길거리 풍경. '신수리', 온통 우리 말이라 낯설지가 않아 일단 편안하다.

 

 

점심먹을 곳보다 막걸리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마음이야 저 쪽이 당기지만~~~~

 

 

음식은 깔끔하고 맛깔났다. 중국식 한식이라 해야 되나? 어쨌던 우리 입에 딱 맞았다. 대동강맥주도 먹을 만했다.

 

 

식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뒤, 공연이 벌어졌다.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간드러진 북한식 목청으로 시작했다. 가야금연주, 춤을 곁들인 노래 등 다양한 공연이었다. 공연비대신 꽃다발을 사 주는 것으로 마음을 전했다.

 

 

 

여행 내내 우리 말로 쓰여진 도시로 인해 마음이 편안했다.

어쨌던 우리 정부의 더 많은 관심도 필요할 거고, 민간 차원의 교류도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

외국에 있으면 애국자가 된다 했는데 이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다. 왜곡된 인식을 풀고 따뜻하게 이들을 품어야 할 것이다.